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 캐나다 워홀을 다녀와서, 다시 영국 워홀을 떠난 디자이너 이야기

#1. 캐나다 워홀을 다녀와서, 다시 영국 워홀을 떠난 디자이너 이야기

 

나는 어릴 때 반에 한두 명씩 있던 ‘맨날 그림 그리는 애’였다. 그림 그리기 대회를 나가고, 만화동아리 활동을 하고, 교문 앞에서 나눠주던 미술학원 연습장에 빼곡히 낙서를 하던. 하지만 그때의 난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기에는 자신이 없었고 딱히 전망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름 취업을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디자이너가 되려고 미대를 진학해서 디자인 공부를 하다가 어영부영 졸업을 했다. 

 

다른 동기들처럼 한국에서 취업을 해보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도, 휴학 중 다녀온 유럽여행 이후로 마음 한편엔 어디든 외국에서 한동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막연히 넓은 땅,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만 같았고 무엇보다 외국에서 디자이너로 사는 건 과연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석사나 학사로 외국 대학교를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뭐 일단 모은 돈도 없었고, 기왕이면 돈이 많이 드는 유학보다는 디자인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보고 싶었다. 무작정 "디자이너 해외취업"으로 검색해보면서, 해외 취업하려면 필요하다는 포트폴리오, resume, cover letter를 어찌어찌 만들어서 일단 그냥 뿌리기 시작했다. 진짜 그냥 세계 곳곳에, 낚싯배에서 넓게 그물 던지듯이. 이때는 솔직히 연락이 올지 안 올지 전혀 모르겠어서 한번 해보기나 하고 접자, 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백 통이 넘도록 이메일을 보내던 어느 날, 드디어 미국 뉴욕에 있는 회사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담당자와 콘퍼런스 콜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데, 도대체 전화는 어떻게 하는 건지 어떻게 받는 건지 누구랑 얼마나 대화를 하게 될지,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등등 모든 게 처음이라 두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당장 구글 검색으로 디자이너 인터뷰를 찾아보고, 예상 질문&대답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약속한 날짜, 시간에 잔뜩 긴장한 채 생전 처음으로 콘퍼런스 콜 인터뷰를 했다. 그나마 화상통화가 아닌 그냥 전화통화여서 꼼수로 벽에 예상 질문 대답 적어놓은 거 덕지덕지 붙여놓고서. 물론 통화할 땐 도저히 정신없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디에 뭘 적어놨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이런저런 말을 떠들다가 끊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4시였는데, 한참 동안 심장이 쿵쾅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그다음 연락은 없었지만 뭔가, '아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본격적으로 외국에 나갈 방법을 찾아봤다.

 

알아볼수록 아무래도 '국내에 있으면서 일을 해보기도 전에 비자를 받고 출국하는 일'은 영 쉽지가 않을 거 같아서, 일단 유학을 제외하고 외국에서 일할수 있는 비자를 알아보다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알게 됐다. 그중 미국도 가깝고 영어를 쓰는 나라인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괜찮아 보였다. 이번에는 고민이 좀 더 많이 됐다. 만약 지금 외국으로 나가면, 앞으로 한국에서의 취업길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난 해외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괜히 지금 한국에서 남들처럼 열심히 취업 준비하기 싫어 그저 도피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괜히 다녀와서 시간낭비 돈 낭비만 하다가 오면 어쩌지, 나이만 늘고, 이력서에 남는 것도 없고, 워홀 다녀왔다 그러면 면접 때 불리한 건 아닐까 등등 뭐 안될 거 같은 이유를 수백 개 만들어내서 종일 끙끙 앓았다. 딱히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외국에 살고 있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각각 장단점을 따져보면서 갈까, 가지 말까를 계-속 계속 고민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 이런저런 이유로 후회할 거 같았고, 안 가면 이런저런 이유로 후회할 거 같았다. 나중에는 진짜 1g이라도 덜 후회할 거 같은 쪽을 택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그래 뭐 일단 가보고 못살겠다 싶으면 돌아오면 되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2011년에 캐나다 워홀을 다녀왔다. 토론토에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운 좋게 디자인 일도 구해서 열심히 일했다. 당시 회사에서 워킹비자 스폰을 해준다고 해서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은 못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순진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회사가 알아서 내 비자를 척척 진행해줄 거라고 믿었고, 괜히 따져 묻다가 비자 스폰 안 해준다 그럴까 봐, 아쉬운 건 나니까 조용히 기다려보자 했던 게 잘못이었다. 물론 좋은 보스를 만났었다면 잘 진행됐을 수도 있었지만 슬프게도 아니었다. 내 비자는 내가 제일 나서서 잘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나에게 세 가지 옵션이 있었다.

1. 비자를 기다려서 다시 캐나다로  가거나

2. 다른 나라 워홀을 가거나

3. 아님 한국에서 일을 하거나.

 

1번은 아무래도 가능성이 낮아 보이고, 언제 소식이 들려올지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2번 다른 나라 워홀을 검색해보다가 영국이 괜찮아 보였는데 신청기간이 아니었다. 이것도 기다리면 몇 달이 붕 뜰 거 같았다. 내내 쉬느니 돈이나 모으자 싶어서 한국 회사에 여기저기 지원하면서, 집에서는 네이버 도전만화에 캐나다 워홀 체험기 웹툰을 만들어 올려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찾아와 보는 사람이 있고 댓글도 달리고 해서 신기했다. (네이버 웹툰 링크) 신이 나서 열심히 만들어 올리다가, 한국에서 다시 취업을 하고 출퇴근을 하다 보니 웹툰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대충 그린 것도 너무 많아서 중후반 웹툰을 보면 좀 부끄럽다. 그렇게 어영부영 마무리를 짓고, 한국에서 열심히 스타트업 회사를 다녔다.

 

나는 한국에서 즐거운 회사 생활이 가능할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꽤 좋았다. 심지어 출근하기가 즐거울 지경으로, 만족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영국 워홀이고 뭐고 여기서 계속 일해야지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운명이 아니었는지 일한 지 1년쯤 되던 해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나는 영국 워홀을 신청하게 된다. 마지막 출근하고 그다음 주가, 때마침 일 년에 한두 번 할 수 있는 영국 워홀 신청기간이었다. 그래서 뭐 고민도 않고 바로 서류 준비해서 신청서를 보냈다. 갈까 말까 고민은 합격하고 해도 되니까. 당시에는 이런저런 필요서류들과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랜덤으로 선정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운 좋게 합격해서 2015년 8월에 영국 런던으로 떠나게 된다.